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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성지소개  성지갤러리  찾아가는 길

▣ 성지명 : 금산사(金山寺)

▣ 위치

 현재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도립공원 내
 상제님 재세시 : 전라북도 금구군 수류면 내

▣ 지명의 유래와 역사

금산사(金山寺)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도립공원 모악산(794m)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금산사지(金山寺志)』에 의하면 이 산의 옛 이름이 '엄뫼', '큰뫼' 라는 순수 우리말로 이후에 한자식으로 바꿔 말한데서 '모악(母岳)'과 '금산(金山)'의 이름이 유래한 것이라 하며 금산사(金山寺)는 '금산에 있는 사원'이란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산의 정상에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아 '모악(母岳)'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금산사의 창건주와 그 시기에 관해서는 전해오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지금과 같은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742-764) 말에서 혜공왕대(765-779) 초로 보여진다. 금산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봉안함으로써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삼국유사』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 이 기록은 1199년 금강산 발연사(鉢淵寺) 주지 영잠(瑩岑)이 지은 '진표율사진신장골탑비명(眞表律師眞身藏骨塔碑銘)'을 초록한 것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율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戒法)을 주니 이에 율사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상(像)은 갑진년(甲辰; 764) 6월9일에 완성하여 병오(丙午; 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택리지(擇里志)』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조에는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못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조사가 만 석의 소금으로 메워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大殿)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 아래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주위를 돌아나온다」고 되어 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지장 미륵보살에게 계본과 간자를 받고 금산사에 미륵전을 짓고자 용추못을 흙으로 메웠으나 메워지지 않자 백일기도를 하여 '용추못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숯으로 메워야만 하고 이 호수물에 만병통치의 영험을 내릴 것이니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 불사를 성취토록 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는다. 율사는 미륵보살의 계시대로 신도들에게 '누구든 병이 있는 사람은 금산사 호수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고 숯을 양껏 가져다 넣으면 나으리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신도들이 한 문둥병 환자가 율사의 말대로 숯을 못에 넣고 그 물로 씻어 병이 낫자 그 소문이 다시 곳곳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불사는 쉽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미륵 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석조 연화대를 세웠으나 불상을 채 세우기도 전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한다. 현존하는 석련대의 조각법 등이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이라 추정되는 점과 당시 옮겨지면서 생긴 듯한 갈라진 흔적은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재 미륵전과 불상은 진표율사가 조성할 당시와는 다르지만 미륵전 주위 땅을 파보면 용추못을 숯으로 메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미륵불상 아래에는 솥 모양의 철수미좌(鐵須彌座)가 있다. 사람들은 이 수미좌를 솥이라 하고 이 솥을 만지면 영험이 있다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금산사 미륵불은 그동안 세 번의 변화를 거쳤는데 진표율사에 의해 모셔졌던 불상은 보처불이 없는 독존으로 철불이었지만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미륵전을 태우고 철불은 뜯어갔다고 한다. 그 후 수문대사가 인조 5년(1657)에 소조불로 재건하였으나 1934년 실화로 주불이 소실되었고 성열대사에 의해 1938년 석고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미륵전 건물은 선조 30년(1577) 정유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그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미륵전은 외관 3층으로 된 우리나라 유일한 법당이며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止會)', 3층은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본래 미륵은 Maitreya라는 대승보살로서 이를 번역하여 자씨(慈氏)라고 하며 또 그가 석존 입적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사바 세계에 출현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도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건물은 미래불인 미륵불을 봉안했으므로 '미륵전', 그 미륵은 자씨이므로 '대자보전' 또 설법하는 회상이 용화회상이므로 '용화지회'라 하는 것이다.

금산사 대장전은 미륵전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수문대사에 의해 인조 13년(1635)에 재건되었으며 1922년 미륵전 앞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다. 대장전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에 대한 기록을『전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 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 (공사 2장 11절)
『금산사 사적기』에 의하면 본래 대장전은 미륵전의 정중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는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하며 당시에는 목탑 전각 속에도 불상이나 경전을 봉안하는 예가 일반화 되어 있으므로 목탑이 변화되어 대장전이란 일반 불전이 된 듯 하다. 그러나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과 보주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현재 대장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과 아난의 제자상을 봉안했다. 

▣ 성적(聖蹟)-성지 관련 행적

상제님 행적

도전님께서는 「금산사도 진표율사가 용추(용소)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 놓은 위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은 증산(甑山)·정산(鼎山)의 양산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 놓은 것이다. (대순지침 15p)」,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眞理)를 밝혀 주신 것이다. (대순지침 14p)」라고 밝혀주셨다.

진표(眞表)율사가 조성한 이곳 미륵전의 미륵금불에 천하를 대순하신 상제님께서 30년간 영으로 지내시면서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계시하셨다. 그러나 최제우가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하자 그 천명과 신교를 거두시고 구천상제님께서 신미년(1871)에 강세하시게 되는데 『전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가라사대「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딴 것이라」이르시고「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1장 9절)  

상제께서 九천에 계시자 신성·불·보살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서양(西洋)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三十년을 지내시면서 최 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셨다가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셨도다. (예시 1절)  

이러한 금산사 미륵불에 대하여 상제님께서 상제님이 곧 미륵이심과 종통을 예시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전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상제께서 어느날에 가라사대「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毫珠)가 있고 왼 손바닥에 임(壬)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戊)자가 있음을 종도들이 보았도다. (행록 2장 16절) 

또 상제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와 비유하기도 하셨도다. (예시 15절)  

상제께서 가라사대「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셨도다. (행록 5장 29절)  

 그 외 관련 <전경> 구절

예시 14. 금산사에 상제를 따라갔을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 
            만국 활계 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 명월 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 개화 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 운통 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  
            란 구절을 외워주셨도다. ( 

교운 2-15. 도주께서 칠월 보름에 이 우형(李佑衡)을 앞세우고 금산사에 다녀오시니라. 권 태로·이 상우·박 붕래(朴朋來)와 여러 무리들의 앞에서「오늘이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고 분부하시니 그들이 모두 자기의 허물을 개과하기에 힘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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