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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

 성지소개  성지갤러리  찾아가는 길

▣ 성지명 : 금구(金溝)ㆍ금구군(金溝郡)

▣ 위치

 현재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일대 (읍치)
 상제님 재세시 : 전라북도 금구군

▣ 지명의 유래와 역사

본래 백제의 구지산현(구지산현)인데,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금구로 고쳐서 전주의 딸린 현이 되고, 고려 제18대 의종 24년(1170) 이의방의 외향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하였으며, 조선 제26대 고동 32년(1895)에 군이 되어, 동도, 서도, 남면, 일북, 이북, 낙양, 수류, 초처의 8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편입되어 현재는 김제시 금구면, 봉남면, 황산면, 금산면의 4개 면의 지역이 되었다.
금구군은 전주와 김제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은 산지 서쪽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읍치는 현재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금구의 진산은 봉두산(鳳頭山)인데 산의 모양이 봉황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의 수류면(현재 금산면)에는 모악산(母岳山)이 솟아있고 이 산에서 발원한 많은 물줄기가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흘러간다.

▣ 성적(聖蹟)-성지 관련 행적

상제님 행적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현재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 내주 마을)에는 상제님 처가의 집안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1894(갑오)년에는 이곳에서 글방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셨다.
또 상제님을 처음으로 모시며 종도가 된 김형렬이 살던 곳이 금구군 수류면 환평리이며 수류면의 원평은 인근 지역 물산의 집결지이며 교통의 요충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번화한 곳이었다.
금구는 상제님께서 많은 천지공사를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기행이적과 의술을 베푸셨던 곳이다.

관련 <전경> 구절

행록 1-20. 상제께서 갑오(甲午)년에 정 남기(鄭南基)의 집에 글방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이 비범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도다. 글방은 처남의 집이고 금구군 초처면 내주동(金溝郡草處面內住洞)에 있었도다.

공사 1-8. 상제께서 임인년 가을 어느날에 김 형렬에게「풀을 한 곳에 쌓고 쇠꼬리 한개를 금구군 용암리(金溝郡龍岩里)에서 구하여 오게 하고 또 술을 사오고 그 쌓아놓은 풀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쇠꼬리를 두어 번 둘러내라」고 이르시고 다시 형렬에게「태양을 보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햇무리가 나타났음을 아뢰이니라. 그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이제 천하의 형세가 마치 종기를 앓음과 같으므로 내가 그 종기를 파하였노라」하시고 형렬과 술을 드시었도다.

교운 1-6.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에 정 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 때 김 형렬과 김 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교법 2-10. 공우는 종도들이 모두 상투를 틀고 있는데 자신이 삭발하였기에 그들과 싸이기 어려우므로 불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머리를 길러 솔잎 상투에 갓 망건을 쓰고 다니다가 금구(金溝)를 지나던 어느날 일진회의 전 동지 십여명을 만나 그들의 조소를 받고 머리를 깎여 두어달 동안 바깥 출입을 금하고 다시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도다. 돌연히 상제께서 찾아오셔서 한동안 출입하지 않는 까닭을 물으시니 공우가 사실 그대로 아뢰이니라. 상제께서 이르시기를「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요.」이 말씀을 하시고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로 떠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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