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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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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명 : 서천교

- 관련지명 : 서천교 네거리 서원규의 집, 약국

▣ 위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

▣ 지명의 유래와 역사

전주천은 다가교를 지나면서부터 서천(西川)이라 부른다. 그 중 매곡교와 완산교 중간에 놓인 다리가 서천교이다.
서천교는 전주부성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벽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데, 서문밖 장(場)과 남문밖 장(場)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에는 박참판 다리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는 일제시대 박기순이라는 사람이 출자하여 이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서천교는 한양에서 목포를 연결하는 경목선의 중요한 다리인데도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여름과 가을의 장마철이 되어 큰 물이 흐를 때마다 무너져 내리곤 해서 원근의 행인들이 건너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관찰사의 주도하에 성내 관민 유지들이 출원하여 1833년에 다리를 완공하였다. 그런데 <완산지>에 의하면 서천교는 그후 홍수로 유실된 듯하며 다시 1854년에 부성민들이 고쳐 놓았다고 한다. 그 후 1896년에 승지 김창석이 사재로 개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후 1932년에 갑부 박기순이 현 위치에 목교를 놓았었는데 5년도 채 안되어 1936년에 큰 홍수로 다시 유실되었다고 한다.

▣ 관련 행적

서천교를 지나 전주 시내로 들어가면 현재 다가동 우체국 앞의 네거리가 나온다. 이 곳이 예전 서천교 네거리로 불리던 곳으로 인근에 약방들이 많이 들어서 있기에 약전거리라고도 했다. 상제님의 종도였던 서원규는 이 곳에서 큰 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04(갑진)년 장효순의 화란을 겪고 약방을 폐쇄하였다.

 
▣ 관련 <전경> 구절

행록 3-2. 흥해의 부친은 본래 성질이 사나와서 부중 사람들로부터 천둥의 별명을 가졌느니라. 그는 손자의 죽음에 분통이 나서 상제를 원망하니라.「이것은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이 분명하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아무리 위독한 병이라도 말 한 마디로 고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도다. 내 손자를 고의로 죽이지 않았다면 물은 고사하고 흙을 먹였을 지라도 그 신통한 도술로 능히 낫게 하였으리라.」그는 분노에 못 이겨 몽둥이를 들고 와서 상제를 난타하니 상제께서 유혈이 낭자하니라. 그제서야 상제께서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일어나시려고 하시니라. 이때 그는 살인범이라고 소리치며 상제를 결박하여 장방(長房)으로 끌고 가다가 갑자기 결박을 풀면서「이것이 다 나의 잘못이니다. 어린애가 급병으로 죽은 것을 어찌 선생님을 원망하리오.」뉘우치 듯이 말하고 옛 정으로 돌아가시기를 원하며 자기 집으로 동행하시자고 권하는지라. 상제께서 들으시지 않고 서 원규(徐元奎)의 집에 가셔서 그 날 밤을 지내시고 이튿날에 전주(全州) 이동면(伊東面) 이 직부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4. 다음 날에 흥해의 부친은 상제를 서 원규의 집에서 찾았으되 헛탕을 치니라. 그는 또 화가 치밀어 상제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고 마구 지껄이면서 상제가 계실만한 곳을 여기 저기 찾으니라. 그는 상제를 찾다 못 찾으니 상제의 식구들을 전주군 화전면 화정리에서 찾고 행패를 부렸도다. 이때 상제의 가족은 이곳에 있는 이 경오(李京五)의 좁은 방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도다.

행록 3-6. 이로 인하여 상제의 가족은 화를 피하여 태인 굴치로 가고 형렬은 밤중에 피하고 원규는 매일 그들의 행패에 견디다 못 견디어 약국을 폐쇄하고 가족과 함께 익산(益山)으로 피하였도다.

교운 1-12. 김 병욱은 계묘(癸卯)년 四월부터 남원(南原)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게 되었도다. 이 때에 박 영효(朴泳孝)가 일본(日本)에 망명하여 혁명을 도모하고 병욱이 또 그에 연루하였도다. 관은 그 당원을 체포하기로 정하고 八월에 포교가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도다. 전주 군수 권 직상이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보냈도다. 그 전날 미리 상제께서 남원에 가셔서 병욱을 숙소의 문 바깥에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시키고 가죽신 대신에 짚신을 신게 하고 밭둑과 언덕을 걸으시니 병욱은 묵묵히 뒤만 따랐도다. 한 주막에서 점심을 끝내시고 다시 걸어가시다가 그의 선산밑에 이르니 때는 이미 저물었도다. 그제서야 상제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묘소를 물으시니 바로 이 곳이라고 그가 아뢰니 상제께서 또 묘형을 물으시니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여쭈는지라. 말씀하시되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소 우는 소리가 나는도다. 병욱이 소의 울음소리를 아뢰이니 상제께서 「먼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한참 있으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우는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고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이 곳에서 그날 밤을 새우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여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도다. 그는 남원에 갔다 와서 서울 포교가 병욱을 수색함을 아뢰이니 이때 비로소 병욱이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모르도다. 상제께서 다시 묘지기에게 여자가 타는 가마를 마련케 하고 병욱을 거기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에 이르러 병욱으로 하여금 먼저 서 원규의 집에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시니라. 그는 먼저 원규의 집에 들어서니 원규가 몹시 놀라면서 「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 하는 중이니라」고 말하는도다. 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와 자기가 남원을 벗어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원규로 부터 듣고 상제께서 천신이심에 탄복하여 마지 아니하는도다. 포교는 남원에 이르러 병욱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군수 권 직상을 조르고 각처에 게시하거나 훈령을 내려 병욱을 잡아들이게 하는 중이었도다.

교운 1-13. 병욱은 서 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오셔서 병욱에게 근심말라고 이르시니라.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 두번이 아니였고 여러 사람을 이곳 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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