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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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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명 : 와룡리

     → 관련 지명 : 화양동, 첨성대

▣ 위치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구곡 송시열 유적지

▣ 지명의 유래와 역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의 송시열 유적지 내에 있는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 때 송시열의 제자인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넉 자를 얻게 되어 귀국한 후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게 하였다. 이후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권상하는 이에 따라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현재 화양구곡 제5곡의 첨성대의 바위 중턱에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다시 모본하여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만동묘는 이후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는데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져서 1865년(고종 2)에 만동묘를 철폐했다.
그 뒤 유생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다가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여러 유림들이 소를 올려 이듬 해인 1874년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1908년에는 다시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함과 동시에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 현재 만동묘는 화양구곡의 송시열 유적지로 복원되었다.

만동묘의 건물은 묘우(廟宇) 5칸, 정침(正寢) 3칸, 동·서 협실(夾室) 각 1칸, 성공문(星拱門) 3칸, 좌·우 협문(夾門) 각 1칸, 좌·우 낭(廊) 각 3칸, 신주(神廚) 중 1칸, 동방(東房) 1칸, 서방(西房) 2칸 등으로 운영담(雲影潭) 위쪽, 낙양산(洛陽山) 밑에 북향으로 위치해 있었다.
묘우에는 지패(紙牌)를 봉안하고, 정침과 동·서 협실은 제관의 숙소 또는 유림들의 회합이나 학문 토론 장소로 쓰였고, 신주 중 1칸과 동방 1칸은 제물의 봉진(奉進)에, 서방 2칸은 집사(執事)의 숙소로 각각 쓰여졌다.

▣ 성적(聖蹟)-성지 관련 행적

상제님께서 청주 만동묘에서 천지공사를 행하려 하셨으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려워 대신 청도원(당시 전주시 우림면 청도원, 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청도원 마을)의 류찬명의 집에서 천지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으니 이를 청국공사라 하셨다.(공사 2장 6절 참조)
이 때가 <전경>에는 날짜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 <선도진경> 등에 1908(무신)년 4월 경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후 상제님께서 고부 와룡리에 계실 때 청국 광서제에 응기하여 있던 황극신을 옮겨와야 한다고 하시며 공사를 행하시니 황극신이 광서제로부터 만동묘로 옮겨져 오게 되었다. 얼마 후 광서제가 붕어하였으니 1908(무신)년 11월 14일이다. 상제님께서 황극신을 옮겨오는 공사를 보신 것은 1908(무신)년 11월 14일의 며칠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51(신묘)년 3월에는 도전님께서 도주님의 분부로 화양동의 만동묘에 다녀오셨다.

1954(갑오)년 3월에는 도주님께서 만동묘에 가셔서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다음 날에 화양동 제5곡 첨성대 벽면 아래쪽 석문에 두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의 네 자와 만력어필의 네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관련 <전경> 구절

공사 2-6.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하시고 청도원 류 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그 때에 김 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예시 67. 상제께서 또 어느날 약방 대청에 앉고 류 찬명을 마루 아래에 앉히고 순창 오선위기(五仙圍碁), 무안 호승례불(胡僧禮佛), 태인 군신봉조(群臣奉詔), 청주 만동묘(萬東廟)라 쓰고 불사르셨도다. 이때에 찬명이 좀 방심하였더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신명(神明)이 먹줄을 잡고 있는데 네가 어찌 방심하느냐.』 하셨도다.

공사 3-22 상제께서 어느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르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교운 2-49. 박 한경(朴漢慶)이 도주의 부르심을 받고 청주의 근방에 있는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찾으니 건물은 왜정 때에 없어지고 빈터만이 남아있는 사정을 도주께 아뢰었도다. 또 그는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한규(柳漢珪)를 데리고 화양동에 가서 도주께서 거처하실 곳을 마련하고 기다렸으되 다음 기회에 미루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도다. 신묘년 삼월에 있었던 일이니라.

교운 2-50. 갑오년 삼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 하니라. 다음 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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