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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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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명 : 원평

▣ 위치

 현재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 상제님 재세시 : 전라북도 금구군 수류면 원평리

▣ 지명의 유래와 역사

원평장은 조선 선조때부터 형성되어 현재에도 장이 서는 5일장이다.
금산면사무소 입구에서 금산지서 앞을 지나 원평천을 건너는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에 있는 둑을 타고 100여 m 올라가면 둑 오른쪽이 원평리 유목정이며 예전 원평장터이다.
원평장터에는 1919년 3월 20일 원평장날에 장터에서 이 마을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기념해 세운 독립만세비가 세워져 있다.

▣ 성적(聖蹟)-성지 관련 행적

 관련 <전경> 구절


행록 3-9. 상제께서 갑진년 정월에 장 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 성보(金成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 때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줌을 베어 주시며「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5-4. 상제께서 기유년 어느날 원평 시장 김 경집(金京執)의 음식점에 사관을 정하시고 오랫동안 왕래하셨도다. 그는 상제의 말씀이라 하여 주식을 청하는 사람에게 대금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고 음식을 제공하였도다. 이즈음에 청석골에 살고 있는 강 팔문(姜八文)이란 자가 술과 밥을 먹고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금을 내지 않고 상제께 미루고 가니라. 팔문은 그 음식을 먹고 난 뒤부터 배가 붓기 시작하더니 사경을 헤매느니라. 이 사실을 신 경수가 상제께 아뢰이니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니라. 병세가 더 위급하여졌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가라사대「몹쓸 일을 하여 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으니 할 수 없노라」하시더니 그후 곧 그의 사망이 전하여졌도다.

공사 2-1. 상제께서 정미년 三월초에 광찬을 대동하고 말점도(末店島)에 들어가시려고(광찬의 재종이 말점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있었음) 갑칠과 형렬을 만경 남포(南浦)에 불러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성백의 집에 가서 그대로 시행하였도다. 그후 상제께서 말점도로부터 나오셔서 그 짚신을 원평 시장에 가서 팔게 하시고 그 종이등에는 각기「음양(陰陽)」두 글자를 쓰셔서 불사르시니라.

공사 3-35. 상제께서 하루는 구릿골에서 밤나무로 약패(藥牌)를 만들어 패면(牌面)에다 만국의원(萬國醫院)이라고 글자를 새겨 그 글자획에다 경면주사(鏡面朱砂)를 바르시고 이 약패를 원평(院坪) 길거리에 갖다 세우라고 공우(公又)에게 명하셨도다. 공우가 약패를 갖고 원평으로 가려고 하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이 약패를 세울 때에 경관이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려하느뇨」하시니 공우 여쭈길「만국의원(萬國醫院)을 설치하고 죽은 자를 재생케 하며 눈먼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도 걷게 하며 그밖에 모든 질병을 다 낫게 하리라고 하겠나이다」고 아뢰니「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시행하라」하시고 그 약패를 불사르셨도다.

교운 1-6.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에 정 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 때 김 형렬과 김 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교운 1-15. 이해 七월에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였도다. 김 형렬이 상제를 뵈옵고자 이곳을 지나다가 동학당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찾아 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이니 상제께서 그 모임의 취지와 행동을 알아오도록 그를 원평으로 보내시니라. 그는 원평에서 그것이 일진회의 모임이고 보국  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임을 탐지하고 상제께 되돌아가서 사실을 아뢰었도다. 이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 이로부터 일진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니라. 이 일로써 전주 부민들은 상제께서 하시는 일을 감복하면서 공경심을 높였도다.

교운 2-10. 도주께서 무오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길은 상제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라 하시도다.

권지 1-11. 상제께서 어느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三十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 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도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 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의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하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 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 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권지 2-13. 상제께서 황 응종ㆍ김 갑칠을 데리고 원평 앞 다리를 지나려고 하시는데 저편에서 말을 타고 세 사람이 오는지라. 이것을 보시고 왼발로 길바닥을 한번 구르고 다리 머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셨도다. 달려오던 말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으니 세 사람이 온갖 힘을 다 쓰나 말은 꼼짝달싹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이상히 생각하느니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리를 건너와서 상제께 절하고 「길을 좀 비켜 주십사」고 청하기에 상제께서 웃으시며 한쪽으로 비켜서시니 그제서야 말굽이 떨어지고 그들은 오던 길을 갔도다.

예시 44.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원평이 장상지지(將相之地)이고 대흥리는 왕자 포정 분야처(王子布政分野處)로써 가작 천간옥(可作千間屋)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예시 62. 또 원평이 지금은 건너다 보이나 훗날에는 건너다 보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 그러나 또 다시 건너다 보일 때가 있으리니 그때가 되면 세상 일이 가까와짐을 깨달을지어다.

대순성적도해요람(大巡聖蹟圖解要覽)에서

상제께서 동곡약방(銅谷藥房)에서 밤나무로 약패(藥牌)를 만드셔서 만국의원(萬國醫院)이란 글을 쓰시고 박 공우(朴公又)에게 주시며 「원평(院坪)장터에 갖다 붙이고 오라」 하시면서 「경관이 물으면 뭐라 대답하겠느냐」 하시니 「만국의원을 설립하여 눈먼 봉사, 앉은뱅이, 곱사 등 여러가지 병을 다 고친다고 하겠나이다」고 아뢰니,
「너의 말이 옳도다」 하시고 그 약패를 불사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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