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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1-07-07 조회수 6733
제 목 [인물] 두보(杜甫)

대문장가 두보, 시성(詩聖)으로 칭송받아

 

상제님께서는 “글은 이·두(李太白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교법 2장 42절)고 말씀하신 바 있다. 여기서 이·두는 곧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니 두 사람 모두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들이다.

 

동시대를 살며 친교를 가졌던 이백과 두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 지금까지도 함께 칭송되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백이 생전에 시명을 날려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것과는 달리 두보는 사후에야 비로소 알려져 시성(詩聖)이란 칭호를 들었다.

 

두보(712-770)의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小陵) 또는 소릉야노(少陵野老)라 했다. 집안 대대로 호북성 양양현에서 살았는데 두보는 하남성 공현에서 출생했다.

진(晉)나라 학자인 두예(杜預)의 자손으로, 조부는 초당(初唐)의 학자이자 시인인 두심언(杜審言)이다.

 

두보는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7세 때에 이미 시를 지었고, 지학의 나이인 15세 무렵에는 벌써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24세 때 처음 본 과거 응시에 낙방한 후 산동, 산서, 하남 등지를 여행하며 이백, 고적 등의 시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746년 그의 나이 35세에는 장안으로 와서 거처를 정하며 10여 년 동안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노력했고, 755년 그의 나이 44세 때 비로소 겨우 말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755년 11월에 범양, 평로, 강동 3진의 절도사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하북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며 756년 1월에 웅무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연이라 했다. 이해 6월에 황제 현종은 장안을 탈출하며 사천성 성도에 도착했고, 6월 17일에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했다. 황태자는 도성이 함락 당할 때 북방으로 도망쳤다가 영무에 이르러 황제의 지위에 올라 숙종이라 했다.

   ▲ 두보 시잡 한글 번역

 

두보는 756년 봄 장안에 있다가 5월에 가족을 이끌고 난을 피해 봉선의 외가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6월에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신으로 영무로 가다가 적군에 잡혀 장안으로 끌려가 이듬해 4월까지 성내에 연금을 당했다.

 

757년 4월에 장안성을 탈출해 봉상으로 가서 숙종을 배알하며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었고, 10월에 장안이 회복되자 숙종을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을 변호하다가 미움을 사서 좌천당한 두보는 얼마 후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사천성 성도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공부(杜工部)라고 부르게 되었다.

 

765년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성도를 떠나 기주(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2년 동안 체류하다가 768년에 다시 협곡에서 나와, 악양에 이르렀다. 그 후 주로 선상에서 생활했는데, 마침내 배 안에서 병을 얻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770년 동정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두보의 삶은 44세 때인 755년에 일어난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나누어진다.

 

 28년 동안 개원(開元)의 치(713-741)를 이루어 태평성세를 구가하며 번영을 누리던 당나라가 부정과 사치, 향락에 빠진 왕공, 귀족들의 부패로 무너져 내리며 안록산·사사명 등에 의해 전란이 일어나고, 밖으로 토번 등의 외침이 계속되어 나라 전체가 붕괴되어가는 처참한 현실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정치에 뜻을 둔 두보가 설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외가에 맡겨둔 어린 아들이 굶주림 속에 죽어가도 힘을 쓰지 못했던 두보 역시 피해의 당사자였다.

 

두보 스스로도 때를 잘못 만나 기개와 뜻을 펼쳐보지 못했다고 평한 그의 후반기 삶의 대부분을 가난에 허덕이며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최고의 시들을 탄생케 하였으니, 이 점이 두보 시의 진면목이며 그를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손꼽는 이유이다.

두보의 시에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전쟁으로 어지러운 나라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그의 시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있다.

두보의 시를 모은 책으로는 왕수의 <두공부집(杜工部集)>, 곽지달의 <구가집주두시(九家集注杜詩)>, 구조오의 <두시상주(杜詩詳註)>, 황학의 <보주두시(補注杜詩)>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두보의 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두시(杜詩)는 작시(作詩)의 모범이라 하여 왕명으로 두시집(杜詩集)이 간행되었는데, 1444년(세종 25)에는 원나라 때 두보시를 분류하고 주석을 집대성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간행하였고, 1481년(성종 12)에는 <찬주분류두시>를 언해한 <분류두공부시언해>가 간행되었다.

 

율곡 이이가 이순신에게 “두율천독”하라고 했을 당시에 국내에 유통되었던 두시집은 아마도 <찬주분류두시> 또는 <분류두공부시언해>일 가능성이 높다.

   ▲ 중국 청도에 있는 두보 동상

 

“두보의 율시를 천번 읽어라”

 

율시란 일정한 운율에 따라 엮어진 시를 말한다. 여덟 구로 한 수의 시를 이루며 시구마다 다섯 자로 된 율시를 오언 율시라고 하고, 일곱 자로 된 율시를 칠언 율시라고 한다.

 

두보는 작시(作詩) 때 단번에 시를 짓는 이백과 다르게 교정(校正)과 조탁(彫琢)을 습관처럼 반복하였기에 엄정한 형식을 지닌 율시에 능했고, 율시의 완성자라고도 칭해진다. 1400여 편이 넘는 그의 시 가운데 절반 이상이 율시이다.

 

<전경>에는 두보의 율시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어있다.

 

하루는 종도 김 형렬이 상제님께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며 그 실례를 들어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 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었던 기록이 행록 1장 32절에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조선 선조 때의 인물로 이순신과는 친척지간이었다. 그는 1583년경에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 ’을 주장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인 1584년에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 때 이순신의 나이는 40세였다.

 

이순신(1545-1598)은 32세 이던 1576년에 식년 무과 병과 4등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올라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정사(正史)의 기록만으로는 율곡과 이순신의 직접적인 만남을 알 수 없다. 오히려 율곡이 이순신을 만나보고자 했지만, 이순신이 거절했다고 한다.

 

한편, <임진록> 계열의 고전소설 <흑룡일기>에는  율곡이 충청도 아산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찾아가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와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便靑)’의 두 개의 싯구를 알려주었고, 이순신을 정읍현감으로 추천해 임진왜란을 준비케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와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便靑)’은 모두 당나라의 시인 노륜(盧綸)이 쓴 시들이기에 두보의 율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전경>을 보면, 김형렬이 먼저 상제님께 이야기를 아뢴 것이 당시 두률천독의 고사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면서까지 왜적을 물리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에는 두보의 율시가 많은 힘이 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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