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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논단] 무극도 진업단의 안면도 간척사업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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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종단 대순진리회의 시원이 되는 무극도가 재실기(1917-1925)를 지나 태인도장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종단시대(1925-1941)로 발전하게 된 중요한 분기점은 1925년 무극도 창도 선포이다.(교운 2장 32절 참조, 무극도기에 대한 구분은 <대순회보>65호의 '종단사 연구에 대한 고찰'편 참조)

 

도주님께서는 무극도 창도 시 신앙의 대상, 종지, 신조, 목적 등 종단의 교리와 사업을 선포하시며 종단을 이끌어나가셨다. 그러나 무극도 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로 다른 민족종교들과 함께 무극도 또한 유사종교로 분류되며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관리와 감시를 받아야 했으니 모든 면에서 억압과 차별이 극심했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극도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들은 삭제, 왜곡되어 남아있는 것은 전무하다 시피하다.

 

본 연구에서는 무극도기에 대한 이해의 한 방법으로 1925년 창도 후부터 1935년까지 10여 년 동안 추진된 무극도 진업단의 안면도 간척사업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자료는 <전경> 교운 2장편의 기록을 중심으로 했고, 일제강점기의 기록물인 촌산지순의 <조선의 유사종교>(1936)와 신문기사들을 주로 참고했다. 또한 안면도 간척사업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동진수리조합의 광활 방조제와 간척지에 대한 기록을 참조해서 안면도 간척사업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무극도와 진업단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무극도를 창도하시면서부터 본격적인 종단 시대로 이끌어가셨다. 이 시기에 대한 <전경> 기록은 교운 2장 32절부터 43절까지 12구절에 해당한다.

 

지금의 종단 체제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는 현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어 종교활동을 이끌어나가셨는데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안심(安心) 안신(安身)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추구해야할 목적이라고 천명하시며 상제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수도와 함께 도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활을 이루도록 하셨다. 진업단 조직은 이에 대한 구체적 실천사례이다. 아울러 1925년부터 진업단을 조직해 다양한 분야에서 운영하셨다는 것은 그만큼의 종교적 역량이 창도 초기부터 가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촉탁연구가인 촌산지순이 쓴 <조선의 유사종교>(1936)에서 당시 무극도의 대략적인 운영 체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로지 농업노동에 중점을 두어 교도의 생활안정을 주안으로 하고 이 노동생활을 통해 안심을 구하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 통령(通靈)의 영역에 달하게끔 기하고 있다. (…) 본교에서는 한편으로는 우선근로생활에 의해 경제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일상 주문을 외며, 여가가 있을 때는 경문을 읽어서 안심양성에 노력하고 연후에 통령하는 노력을 쌓아 신명의 영역에 도달하여 천덕에 합하는 것을 그 수도법으로 한다. (…) 안심안신의 본지에 따라서 수도의 요체는 우선 첫째로 의식주의 안정을 획득하는 데에 있다고 하여, 1925년 교도로 하여금 진업단이라는 노동단체를 조직하여 각지의 빈곤한 교도를 수리조합, 삼림벌채, 개간사업 등에 알선 종사케 했다.

 

젊은 청, 장년 도인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은 안면도 간척사업 뿐만 아니라 수리조합, 삼림벌채, 황무지 개간, 금광채굴 등의 다양한 사업에 투입돼 그 이익을 도인들만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도 전하며 생활의 안정을 이루도록 하였다. 일제 치하의 피폐한 생활 속에서는 자급자족하기 조차 힘들었던 상황이었는데, 단순 노동에 의한 생활 구제에서 벗어나 적극적 사회구제를 도모하였던 당시의 진업단 활동은 이후 종교에 의한 대사회활동의 이정표가 될 수 있었다.

 

 

3. 무극도와 안면도

 

진업단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안면도는 충남 태안반도에서 또 남쪽으로 길게 반도처럼 늘어진 섬의 이름이다. 본래 안면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된 곶이었는데 1578년에서 1713년 사이에 삼남지역의 세곡 운반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지금의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뚫은 후 섬이 되어 안면곶이 아닌 안면도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행정구역상 안면도는 고려 때에 안면소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지역이다가,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태안부에 편입되어 안상, 안하의 2면으로 나뉘어졌다. 1909년에 안상, 안하의 2개 면을 합하여 안면면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군폐합령으로 서산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태안군에 속해 있으며 1970년에 연육교가 가설되어 다시 육지와 연결되었다.

 

안면도는 해안선이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하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안면도의 동쪽 해안은 천수만으로 다른 곳보다도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여 간척에 적합한 지대이며, 서쪽 해안은 암초가 많은 지대이다.

 

안면도의 또 다른 특징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는 "안면곶 내 신여리, 중장, 의점 등에서 고려조 이후 지금까지 궁궐 건축과 선박 제조용 목재를 얻었다."고 되어 있고, <동여도>나 <만기요람> 등에는 조선후기의 안면도에 73처의 봉산이 있어서 국용목재를 조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면도는 풍부한 소나무 자원에 눈독을 들인 일본의 광산 재벌 마생 상점은 1927년에 안면도의 소나무 삼림 6400ha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불하받았다. 마생 상점은 바로 임업소와 파출소를 개설하여 지역 주민의 이용을 제한하고 섬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 마생 상점이 <전경>에 나오는 ‘일본 마상 회사’이다.

 

(…)총독부에서 그 섬의 삼림을 방매키로 되어 입찰한결과 일본 북구주의 광산가 마생다길씨에게 팔십이만삼천원에 낙찰되었다는데 이 섬은 형식으로는 삼림지역만 낙찰된 것같이 되었으나 실상은 그 섬은 대개가 삼림지대요, 민유지라고는 극소부분의 경작지가 있을 뿐임으로 사실상 전부 마생씨에게 팔린 셈이 되고 마생씨는 이 섬의 왕이 되다시피 되었는데 (1927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러한 안면도가 종단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바로 도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도주님께서 1917년 구천상제님의 대순진리를 감오득도 하신 후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계시를 받으셨다. 배를 타고 처으 도착하신 곳은 태안반도의 태안이었는데 잠시 머무시다가 바로 안면도로 건너가시며 만주에 계신 가족들도 모두 불러 국내에서의 첫 정착지로 삼으셨다.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 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倉基里)의 이 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 사람 삼십여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 중에서 이 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교운 2장 9절)

 

도주님을 처음으로 따르게 된 종도 30여명도 모두 안면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고, 공부하신 정당리 느락골의 우일재와 창기리의 홍일우, 간척사업을 전개하신 창기리 간척답 등 안면도가 종단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 재실 홍일우 터(새로 지은 집이 들어서 있다.)

 

4. 간척사업의 진행과 경과

 

진업단이 안면도 간척사업에 투입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경>의 기록과 <조선의 유사종교>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1925년 무극도 창도 직후라고 추정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간척지가 조성되어 온전히 농업용지로 사용하기까지는 대략 10여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전례에 비추어 볼 때 1925년부터 간척사업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척사업은 자본과 노동력이 대규모로 들어가는 사업이기 때문에 민간이 주도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소요기간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안면도 간척사업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간척사업은 일본인이 설립한 동진수리조합의 광활 간척사업이다. 1923년 10월,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 100만 엔 등 총 200만 엔을 들여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광활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만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를 온전한 농지로 만드는 데는 약 7~8년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방조제를 쌓아 물을 막아두고 난 후에는 염분을 제거하기 우해 그 물이 서서히 빠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방조제를 만드는 작업보다 몇 배의 기간이 필요한 것이로 당시 일반적인 간척사업의 소요기간이다.

 

간척사업이 시작된 첫 해인 1925년에 안면도는 유래 없던 한재가 몰아닥쳐 큰 피해가 생겼다.

 

충남 서산군 안면도는 인가가 일천삼백여호요 삼림이 울창하야 여간 한재(如干旱災)에는 농작의 피해가 태무(殆無)한 자연의 은택이 불소(不小)한 지방인데 금년에는 전무(前無)한 한재(旱災)로 앙판(秧坂)이 균열(龜裂)하야 묘(描)가 고사(枯死)한 것이 불소(불소)하고 시기는 기만(己晩)하여 이종(移種)할 가망이 무(無)함으로 일반의 우려가 비상(非常)하다고(동아일보. 1925.07.04.)

 

섬 전체에 걸쳐 1,300 호 정도가 살고 있던 안면도는 본래부터 농사지을 땅이 협소했는데 이러한 한재로 더 큰 피해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삼백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교운 2장 35절)

 

1925년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에는 도인들로 구성된 진업단원 약 700여명 정도가 투입되었다.(1997년 조사시 창기리 거주 정풍기 씨의 증언. 작고함)

 

당시에는 현대적인 간척 장비가 없었기에 진업단원들은 갯펄을 막아 방조제를 쌓는 작업에서 오직 삽과 가래, 쟁기로 땅을 파고 맨손과 지게로 돌과 흙을 날라야했다. 조수의 간만이 심하여 한 달 중에 작업할 수 있는 날도 많지 않았다. 사리 때의 밀물일 경우 낮 동안은 작업 시간이 더 짧아지고, 펄 안쪽 깊이 물이 들어왔다가 나가면 펄이 질어져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방조제가 만들어지고 드러난 땅에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년에 걸쳐 물을 넣었다 빼는 작업을 되풀이하며 배어있는 염독을 제거해야 비로소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이 된다.

 

물론 소금기를 제거하는 도중에도 어느 정도의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땅에서 소금기를 제거하는 작업은 제방을 쌓는 일 만큼이나 힘들고 고된 노동이었다.

 

1925년 시작한 간척사업은 대략 1935년경에 끝이 났다.

 

 ▲ 창기리 간척지

 

간척지는 충청남도 안면도에 두 곳, 원산도에 두 곳, 투자 약 2만여원에 달하여 멀지 않아 완성될 것이다. (조선의 유사종교)

 

안면도에 있는 칠십여만정보의 간사지는 원래 동교의 소유지로 만들어(...)사만여교도로부터 공사비를 집금하였고 또 그 교도들의 노동에 의하야 현재 칠십여만정보의 수전이 되어 (1936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

 

* 기사 본문의 칠십여만정보는 칠십여정보가 잘못된 것이다. 1정보는 약 3000평이니 칠십여정보면 이십일만여평이 되어 <전경>의 이십만평이라는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간척 초기의 계획대로 안면도 2곳과 원산도 2곳 모두에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이십만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교운 2장 35절)

 

 간척사업에는 진업단 뿐만 아니라 간척지 주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품삯을 주고 고용해 공사를 진행했으며 먼저 염분이 빠진 논에는 진업단원이 직접 벼를 심거나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위 구절의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다”는 기록은 방조제를 쌓는 작업과 농지에 소금기를 제거하는 작업, 또 먼저 소금기가 제거된 땅에 벼를 심어 경작하는 일에 현지 주민들도 참여해서 그 수익을 함께 나누거나 품삯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 해 나갔다는 의미이다.

 

 

5. 의의

 

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시며 같은 해 바로 조직하신 진업단은 삼림개발, 황무지 개간, 수리, 간척, 금광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인 성과가 안면도 창기리의 이십만평에 이르는 간척답이다. 안면도 간척사업의 의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요약해 본다.

 

첫째, 안면도 간척사업은 토지해원공사이다.

 

상제님께서는 “이제 해원시대를 맞이 하였으니 사람도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리라.”(교법 1-67)는 말씀을 하셨다.

 

안면도는 도주님께서 간척사업을 전개하시기 이전까지는 궁벽한 곳이었다. 섬 대부분이 삼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선 후기까지 이렇다할만한 산업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안면도는 서해의 보물섬으로 각광받고 있다.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써 짜놓으신 토지의 해원이 도주님의 간척사업으로 물꼬를 열게 되었고, 안면도를 시작으로 한 해원의 기운이 우리나라 전 국토를 돌고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안면도 간척사업은 구세제민의 대의를 가진 종교사업이다.

 

도주님께서는 무극도 초기부터 인간 정신의 구제와 함께 사회 공동 복리의 증진을 함께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셨다. 진업단의 활동을 통해 거두어들인 수익금으로 도인 가정의 안녕을 도모하고 이웃과 사회의 발전에 아낌없이 활용한 무극도의 사례는 종교 사업의 선구적 활동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점은 현재.종단 대순진리회의 사업 체계를 통해서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으니, 3대기본사업인 포덕, 교화, 수도사업과 3대중요사업인 사회복지, 구호자선, 교육사업이 이것이다.

 

셋째로, 안면도 간척사업은 도인 가정의 안정을 통해 건전한 종교생활을 양위하기 위해 실시한 사업이다.

 

근로를 통해 의식주의 안정을 이루고 이를 안심 안신의 수행으로 연결하는 무극도의 운영방법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는 종단 사업의 특징이다.

 

안면도는 종단사의 초기 사적을 찾아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성적지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대로 된 발굴이나 조사가 거의 없었던 까닭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향후 종단 차원에서 관련 지역 및 건물, 토지, 임야의 매입과 건물의 복원, 성지순례를 위한 도로 정비 및 주변 녹화 등 성적지 복원사업을 전개해야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대순회보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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