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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경 행록 1장 1절 연구

 

 

전경 행록 1장 1절 연구

 

 

 

강씨는 상고 신농씨로부터 시작되고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

 

행록 1장 1절은 상제님께서 인류 최초의 성씨인 강성으로 우리나라에 강세하시기

    이전 의 내력을 기록하여 원시반본하는 개벽시대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고부는 옛 땅과 시작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원시성인 강성으로 강세하시는

    상제님을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진 성지라 할 것이다.

 

 

 

Ⅰ. 연구의 목적

 

행록 1장 1절은 《전경》의 첫 장 첫 구절이다.

 

대체로 《전경》은 각기 전하는 내용의 성격에 따라 각 편을 이루고 있는데, 행록은 상제님의 가계와 강세, 행적 등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행록 1장 1절은 《전경》의 시작이며 첫 머리의 기록이기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본 고에서는 이러한 행록 1장 1절에 담겨진 의미를 파악해서 《전경》의 첫 기록에 담겨진 의미를 이해하고 《전경》에서 밝히려고 하는 상제님의 행적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본 고는 본격적인 《전경》 연구라기 보다는 《전경》연구에 선행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구절의 이해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  

 

 

Ⅱ. 행록 1장 1절의 구절 연구

 

  1. 강씨는 원시성

 

행록1 장 1절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강(姜)씨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이 구절은 《전경》의 또 다른 구절을 통해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다. 행록 4장 17절에는 『무신년 四월 어느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하셨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내용이 바로 행록 1장 1절의 첫 부분을 설명하는 보완적인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전경》에서는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가 있었음을 말하고, 복희씨는 이미 그 역사가 오래되어 맥이 끊어졌기에 신농씨가 복희씨의 뒤를 이었지만 신농씨의 후손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어서 인류의 시성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성은 강(姜)이요, 명(名)은 석년(石年)이라 전한다. 염제신농씨는 신상(神像)을 갖추시어 화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신 까닭에 염제(炎帝)라 일컬으며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므로 신농씨(神農氏)라 존칭되었다.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는 이밖에도 의술과 약제를 잘 다스려 의술의 신, 약제의 신이 되고 또 팔괘(八卦)를 겹쳐서 육십사괘를 만들었으므로 역자(易者)의 신, 주조(鑄造)와 양조(釀造)의 신이 되었으며 교역(交易)하는 법을 가르쳐 상업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이외에도 신농씨는 물물교환의 시장제도를 개척하고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끼리 서로 모여 화친을 도모하는 습속을 가르치기도 했다.

 

신농씨는 천수(天水: 감숙성 위현)에서 태어나서 강수(姜水: 협서성 기산현)에서 자랐기에 성장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강씨라고 하였다. 《십팔사략》에 따르면 강성은 8세(世) 520년을 대대로 계승하여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또 《제왕세기》에는 『신농씨는 「강성(姜姓)」이라 말하여 이르기를 유교씨의 딸 안등(安登)이 화양(華陽)에 주유하는 소전(小典)과 부부가 되어 신룡의 영감으로 염제신농씨를 낳고 강수(姜水)에서 자라 불(火)을 일으킨 성덕(聖德)으로 왕이 되었다. 이로써 염제(炎帝)라 칭하였고 처음에 진(陣)땅에 도읍하고 다음에 노(魯)땅에 도읍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제성연원고(諸姓淵源考)》의 기록을 보면, 신농씨 이후 태공망까지의 기간 동안에 단성(單姓), 복성(復姓) 등으로 나누어진 성씨는 강씨를 포함해 약 117개 정도라고 되어 있다. 또 강태공의 후손으로 갈리워진 성씨만도 단성 68개, 복성은 62개나 되어 신농씨의 후손들은 강씨 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성으로 갈라졌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강씨는 운남 강씨, 광동 강씨, 산서 강씨, 니연 강씨, 유이 강씨 등이 대표적인 강씨의 계파로 알려져 있다.

 

  2. 진주 강씨의 유래

 

 행록 1장 1절의 두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纂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煬帝) 때에 우리 나라에 건너 오니라.』

 

먼저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纂位公以退野)라고 기록되어 있고』라는 구절을 보면, 중국 광동 강씨보는 중국의 대표적인 강씨 계파인 광동 강씨의 족보이다. 그러나 현재 광동강씨보의 원전을 찾을 수 없기에 원문을 확인할 수가 없지만, 우리나라의 다른 기록에 의거해 관련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진주 강씨 박사공파에서 제작한 《영조 병술년보》에는 『中國廣東姜氏譜曰公佐隋太祖하야 以定天下러니 及煬帝簒位에 公而退野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행록 1장 1절의 다음 구절에서 《숙종 을축년보》의 기록을 언급한 것처럼, 『광동강씨보에』라고 한 구절이 바로 《영조 병술년보》의 기록을 참조로 작성한 구절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조 병술년보》가 영조 42년(병술년)인 1766년에 어사공파에서 《숙종 을축년보》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한 보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조 병술년보》는 달리 《달성보》라고도 부른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전경》 행록 1장 1절의 구절속에는 《을축년보(남한보)》와 《병술년보(달성보)》의 내용을 참조해서 작성했다고 보여진다.

 

다음으로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纂位公以退野)』라는 구절을 해석하면 『공(강이식)이 태조(양충, 수문제의 아버지)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킨 이후 양제(수양제)가 황위를 찬탈하니 공은 관직에서 물러났다.』라는 뜻이다.

 

태조(太祖)는 수나라를 건국한 수 문제의 아버지 양충의 묘호를 말한다. 문제가 황위에 올라 연호를 개황으로 선포한 581년에 자신의 아버지 양충을 무원황제로 추존하고 묘호를 태조라 했다는 기록이 《수서 권1 제기 고조》편에 나온다.

 

다음으로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의 기록이 나온다. 《숙종 을축년보》는 진주 강씨 박사공파에서 간행한 보책이다. 조선 숙종 을축년(1685)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을축년보 혹은 을축보라고 한다. 또 남한사에서 간행되었기에 남한보라고도 한다.

 

이 《숙종 을축년보》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 을축년보 기록의 원문을 살펴보면,  『시조강이식 수양제벌고구려시위병마원수이어수사혹운이수원수지수장란잉류불반미지숙시(始祖姜以式 隋伐高句麗爲兵馬元帥以禦隨帥或云隨元帥知隨將亂仍留不返未知孰是)』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석하면, 『시조 강이식은 수나라가 침공할 때 고구려 병마원수로써 수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고 한다. 혹은 수나라 원수로써 수나라가 장차 어지러워 질 것을 알고 이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점을 통해 볼 때 《을축년보》를 제작하던 당시에도 시조인 강이식이 수나라의 병마원수였는지, 고구려의 병마원수였는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경》에서는 강이식이 고구려 병마원수가 아닌 수나라 병마원수로서 수양제 때에 고구려에 귀화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실제의 《숙종 을축년보》의 기록은 《전경》에서 인용한 부분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경》에서는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 仍留不返)」 :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던 시기에 공(강이식을 가리킴)은 수나라 병마원수가 되어 (수나라 군대를 이끌고) 살수에 이르렀는데 이 때 수나라가 장차 어지러워 질 것을 알고, 이를 기회로 고구려 땅에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국 《광동강씨보》(혹은 《영조 병술년보》)와 《숙종 을축년보》 기록을 비교해 보면, 먼저  『수벌 고구려시(隋伐高句麗時)』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수양제는 재위기간(604~618)동안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따라서 『수벌고구려시』의 시기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1차시기(612년)와 2차(613년) 그리고 3차(614년)의 기간 중에 어느  한 시기임을 알 수가 있는데, 그중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까지 이르게 된 것은 1차 때인 612년의 일이다.

 

또 『지살수(至薩水: 살수에 이르렀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만일 살수대첩이 일어난 해로 추정해서 해석한다면, 612년에 수 양제가 일으킨 1차 고구려 침공시기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까지 이르렀다가 고구려군에 의해 대패한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 이 사실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혹은 통상적인 살수대첩(612년)의 의미 말고, 단지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다음으로 『지수장란(知隋將亂 : 수나라가 장차 어지러워 질 것을 알았다)』의 기록을 역사적 사건과 대조해 살펴보면, 고구려와의 2차 전쟁시기인 613년에 수나라 본국에서 예부시랑 양현감이 일으켰던 내란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이 때 수양제는 본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는데 이 당시 병부상서(현재의 국방부장관) 곡사정이 양현감과의 친분으로 수양제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고구려에 망명했던 기록이 있다.

 

이런 전례에 미루어 강이식 역시 수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고구려에 귀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광동 강씨보》에서는 《숙종 을축년보》의 기록처럼 강이식의 고구려 귀화를 자세히 적지 않고 단지 『수벌고구려시공위병마원수지살수이지수장란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이퇴야(公而退野)』라고 축약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3. 고부 낙향의 의의

 

행록 1장 1절의 세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ㆍ우창(愚昌)ㆍ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 곳에 살았도다.』

 

강이식을 1세로 하여 21세손인 강계용은 진주 강씨 박사공파의 중시조가 된다. 이후 강계용의 3세손인 강사첨의 자손들은 어사공파로 부르고 있다. 계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강이식-강운기-강수손-강박-강극용-강택인-강진-강사진-강기장-강구만-강사미-강홍-강호덕-강진보-강홍명-강철영-강도- 강희경-강복민-강창서-강계용(=박사공)-강인문-강사첨(=어사공)-강창귀-강군보-강시-강회중(=통계공)-강안복-강이온-강부-강세의』 에 이른다.

 

따라서 강세의는 시조 강이식의 31세손이 되며, 이 때에 이르러 강씨가 비로소 고부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강이식의 31세 자손 강세의가 고부로 낙향한 사실을 행록 1장 1절에서 기록한 이유는 교법 2장 47절의 『고부(古阜)는 예절을 찾는 구례(求禮)이니라.』라는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고부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고부는 백제 때에는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었고 후기에 5방 중 중방(中方)이 설치된 요지였다. 663년 당나라 치하에서 고사주(古四州)로 개칭하고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고부군이라고 했다.

 

이후 고려 태조 19년(936)에 영주(瀛州)로 이름을 바꾸었고 관찰사를 두다가 광종 2년(951)에 안남도호부로 고쳤다가 현종 10년(1019)때에 다시 고부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지금처럼 고부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정읍군에 병합되면서 현재는 정읍시 고부면으로 이름이 남아있다. 고부(古阜)라는 이름은 옛 언덕, 첫 발상지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 고부에는 삼신산의 하나인 두승산 일명 영주산이 있으며, 고부의 옛 이름을 영주(瀛洲)라고 했다.

 

이처럼 고부는 땅이름에서 시원의 의미를 갖고 있으니, 중국 수양제 때에 우리나라로 건너온 강이식의 31세 자손 강세의가 고부로 낙향하게 된 것이 바로 미래에 상제님께서 인류 최초의 성씨인 강씨성의 몸으로, 시원의 의미를 뜻하는 고부 땅에 강세하시게 된 연유를 만들게 된 것이다.

 

 

Ⅲ. 결어

 

지금까지 행록 1장 1절의 내용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부분은 인류 최초의 성씨가 되는 강씨의 유래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상고 신농씨가 인류 최초의 성씨인 강씨의 시조가 되기에 상제님께서 강씨로 강세하신 것은 원시반본하는 개벽시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중국에 살고 있었던 강씨가 우리나라에 건너오게 된 것이 중국 수나라 양제 때의 일이었음을 《전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우리나라에 정착한 강씨의 세손이 되는 강세의가 고부로 낙향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고부는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곳이기에 예절을 찾는 구례(求禮)가 되어  그 의미가 크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행록 1장 1절은 모두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기 이전의 기록이며 상제님께서 강씨성을 가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강세하시게 된 연유와 우리나라의 한 지방인 전라북도 고부에 강세하시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고부는 옛 땅과 시작지를 의미하므로 원시성인 강씨성과 시작지인 고부에 강세하시게 된 필연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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