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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무경(玄武經)

 

현 무 경(玄武經)

 

 

현무경은 몇 안 되는 상제님의 친필유품 중에서 상제님의 공사내용을 담고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상제께서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천지공사의 내용을 친필로써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현무경은 대순사상사에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나, 그 출처 및 해석방법에 있어서 많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현무경에 대하여『전경』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현무경과 관련된『전경』의 기록은 두 가지인데, 교운 1장 66절의 “상제께서 기유(己酉)년 정월 一일 사시(巳時)에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종필하고 한 벌은 친히 품 속에 지니고 한 벌은 도창현(道昌峴)에서 불사르고 나머지 한 벌은 경석의 집에 맡기셨도다”와 행록 5장 37절의 “치상 후에 형렬과 경석은 상제의 부친을 모시고 객망리에 가서 모친을 조문하고 다시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玄武經)을 옮겨 썼도다”의 기록이 그것이다. 상제께서 현무경을 한 벌이 아니고 세 벌을 작성하셨다는 기록은『대순전경』이나『천지개벽경』등 다른 종단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사실이다. 물론『전경』의 기록은 1965년에 간행된 태극도의『선도진경』에 근원을 둔 것이다.

 

먼저『전경』에서는 상제께서 현무경을 작성하신 시기가 1909년 1월 1일(음력) 사시(巳時 : 오전 9시 ~ 11시)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작성하신 현무경의 수는 세 벌인데 한 벌은 도창현에서 불사르셨으므로(이 또한 다른 기록에는 실려있지 않다) 남은 것은 두 벌인데, 문제는 친히 품 속에 지니셨다는 한 벌과 경석의 집에 맡기셨다는 다른 한 벌의 행방이다.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 김형렬과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을 옮겨 썼다는 기록에서 이 현무경이 상제께서 친히 품 속에 지니신 것인지 아니면 경석의 집에 맡기신 것인지 먼저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벌은 경석의 집에 맡기셨도다”라는 기록을 상제께서 현무경을 차경석에게 맡기셨다라고 해석을 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따를 것같다(실제로『대순전경』등에서는 상제께서 차경석에게 맡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상제께서 현무경을 차경석에게 맡기셨다고 한다면 상제님의 화천 후, 차경석이 김형렬과 같이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을 옮겨 적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 현무경의 소지자는 차경석이 되지 결코 고부인이 될 수 없을터인데, 상제님의 화천 후 현무경은 사실적으로 고부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제께서 현무경을 맡기신 ‘경석의 집’은 1907년에 수부로 추천된 고부인이 기거하던 방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실질적으로 고부인은 수부로 추천된 후, 정읍 대흥리에 있는 차경석의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행록 5장 38절에 상제께서 거처하시던 방에서 물이 들어 있는 흰 병과 작은 칼이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에 발견되었다는 기록(그 흰 병의 병마개로 쓰인 종이에 적힌 글이 일명 ‘병세문’이다)이 있는데, 바로 상제께서 거처하시던 이 방이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거주하던 고부인의 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상제님의 화천 후 김형렬과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을 옮겨 썼다는 행록 5장 37절의 현무경은 교운 1장 66절의 상제께서 쓰신 세 벌의 현무경 중에서 차경석의 집에 맡겨 놓았다는 현무경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상제께서 집필하신 세 벌의 현무경 중, 한 벌은 도창현에서 불사르시고 또 한 벌은 정읍 대흥리의 차경석의 집안에 있는 상제께서 거처하시던 방에 두었으며 나머지 한 벌은 친히 품 속에 지니셨는데, 상제께서 친히 품 속에 지니셨다는 나머지 한 벌의 현무경 행방이 묘연하다.

 

현무경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탐색하기 위해서는 상제께서 현무경을 집필하신 장소에 관하여 먼저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전경』에서는 상제께서 현무경을 집필하신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른 문헌에서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그것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대순전경』에서만도 판본에 따라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과 안내성의 집(안내성의 집 역시 정읍 대흥리에 위치하고 있었다)이 혼용되어서 나타난다. 상제께서 현무경을 집필하신 장소가 정읍 대흥리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기유년(1909) 정월 1일과 2일등에 상제께서 정읍 대흥리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신 기록이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제께서 기유년 정월 1일 사시(巳時)에 차경석의 집에서 현무경을 집필하셨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오히려 같은 대흥리에 있는 안내성의 집이 더 유력하다. 만약 상제께서 차경석의 집에서 현무경을 쓰셨다면, 상제께서 세 벌의 현무경을 쓰신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내성의 집에서 쓰셨다면 그것이 전혀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성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제께서 같은 책을 세 벌 쓰셨는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문헌에서는 상제께서 안내성의 집에서 현무경과 병세문을 쓰셨으며 그것을 나중에 차경석이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 역시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우선 상제님의 행록에 관한 최초의 기록서인『증산천사공사기』에도『전경』처럼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 김형렬과 차경석이 대흥리에 상제께서 비치하신 현무경을 옮겨 적었으며, 거처하시던 방에서 병세문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만약에 상제께서 현무경과 병세문을 안내성의 집에 두었던 것을 차경석이 가져갔다면 당연히 그 현무경과 병세문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을텐데, 정읍 대흥리에 비치하신 현무경은 상제님의 화천 후에 사실상 고부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순천교의 창시자인 장기준이 1913년에 고부인에게 검은 소를 사서 드리고 현금 1천원을 올리자 고부인이 현무경을 보여 주었으며, 이에 장기준은 고부인에게 간청하여 현무경을 옮겨 적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부인이 차경석과 결별한 후에도 현무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상제님의 화천 후 정읍 대흥리에 비치하신 현무경을 실질적으로 고부인이 소유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상제께서 현무경을 안내성의 집에 비치한 것을 후에 차경석이 가져갔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한편『증산교사』의 저자인 이정립은『현무경지』에서 조금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선 이정립은 현무경의 작성시기가 기유년(1909) 정월 1일이 아닌 정월 2일이며, 상제님의 화천 후에 김형렬과 차경석이 정읍 대흥리로 가서 상제께서 비치하신 현무경을 옮겨 적은 것(이 내용은『전경』뿐 아니라 상제님의 행록을 최초로 기록한『증산천사공사기』에도 실려 있다)이 아니라 임자년(1912) 가을에 김형렬이 대흥리에 와서 차경석이 외출한 틈을 타 고부인에게 청하여 등사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현무경 원본은 기사년(1929) 4월, 차경석이 일경에게 가택수색을 당하자 며느리 최씨에게 주었지만 그 행방이 묘연하며 김형렬은 자기의 사본을 이상호에게 다시 등사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부분의 자료에서 상제께서 현무경을 작성하신 시기를 기유년 정월 1일 사시로 보고 있으며, 현무경 첫 장에 ‘己酉 正月 一日 巳時’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정립이 주장한 현무경 작성 시기는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고부인이 차경석과 결별하고 정읍 대흥리를 떠난 1918년에서 10년이 지난 무진년(1928)에 현무경을 사용한 기록(『선도신정경』, p.169)을 볼 때, 1929년에 차경석이 며느리에게 주었다는 현무경을 원본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김형렬이 이상호에게 등사케 한 현무경처럼 차경석이 며느리에게 준 현무경도 고부인이 가지고 있던 원본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김형렬이 현무경을 옮겨 적은 시기가 1912년에 차경석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고부인에게 청하여 한 것이 사실이라면『전경』과『증산천사공사기』의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 김형렬과 차경석이 대흥리로 가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을 옮겨 적었다는 기록은 김형렬과 차경석이 각기 하나씩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차경석만 현무경을 베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현무경은 정읍 대흥리의 안내성의 집에서 세 벌이 작성되었으며(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무경이 세 벌 작성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설명할 길이 묘연하다), 그 중의 한 벌은 나중에 도창현에서 불사르시고 다른 한 벌은 친히 품 속에 지니시고(이 한벌의 행방은 묘연하다) 마지막 한 벌은 차경석의 집에 있는 고부인이 거주하던 방(병세문이 발견된 상제께서 거처하시던 방을 의미한다)에 비치하셨는데, 이 현무경은 후에 고부인이 소지하였으며,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 김형렬과 차경석이 이를 옮겨 적었고(화천 직후에는 차경석이 옮겨 적고 김형렬은 그 후 1912년에 옮겨 적었을 수도 있다) 법문파로 알려진 순천교의 창시자인 장기준 역시 고부인이 소지하고 있던 현무경을 베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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